국민일보/이사람이 사는 이야기/유동우 2002년 9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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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8-07 19:51 조회2,8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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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이 사는 이야기)인천시설관리공단 주차원노조 유동우 위원장
기사입력 2002-09-22 15:09 최종수정 2002-09-2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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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가지고 현장에서 일하는 떳떳한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1977년 현장노동자의 수기인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대학가와 지식인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유동우씨(53). 87년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노동계 대표로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했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인천시설관리공단 소속 주차원 190여명의 일터를 지키는 노조위원장으로 생활하면서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창작과 비평사의 웹메거진(www.changbi.com) 지난 7월호에 ‘진보콤플렉스를 넘어서’라는 글을 통해 ‘진보콤플렉스’가 대중적인 노동운동의 하부구조를 망가뜨렸다고 목소를 낸 것을 시작으로 요즘에는 자신이 운동권에 몸담으면서 만나온 인사들에 대한 재평가 등을 담은 ‘돌멩이’들의 뒷얘기를 정리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먹히지 않고 노동운동의 방향도 아득해 보이는 시절에 과거의 힘들고 소중한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노동자상(像)’을 모색하고 나선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는 합법적인 제도 아래서 우리는 노동자를 교육하고, 단체협상과 임금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시대와 노조원들이 목표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무용론을 외치며 정치운동으로 번졌던 과거의 이념논쟁은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80년대만 해도 공단 이곳저곳에 각종 소모임의 활동이 활발했지만 요즘은 현장운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하여 작은 것부터 개선해 나가는데 힘을 쏟겠습니다”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뒤 68년 3월 상경해 천일섬유·유림통상·방성산업·삼원섬유㈜ 등에서 노동자로 생활한 그는 73년 인천 부평공단의 외국인투자기업인 삼원섬유㈜에 노조를 설립했다. 그후 해고된 뒤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교육담당을 하는 등 공단이 있는 전국 각지역을 돌며 수많은 노동조합 설립에 산파역할을 했다.
77년에는 월간지 ‘대화’ 1·2·3월호에 새벽에 일터로 나가 일하다 통금사이렌을 듣고는 퇴근을 포기해야 하는 삶을 살면서도 먹고 살기 힘든 노동자들의 실상과 노조 해체과정을 담은 수기를 연재했다. 당시 이 수기는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얻으면서 ‘어느 돌맹이의 외침’이란 책으로 묶여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은 당시 작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대학생들 사이에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판금 조치됐지만 해적판 책을 읽은 대학생들이 인세를 모금해 올 정도였다.
81년에는 비공개 조직이었던 전민노련의 운영위원으로 일한 이태복씨가 체포된 뒤 그 해 8월 유씨도 검거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개월 이상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망가지지 않아 법정에서 논리정연한 진술로 방청석의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그후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지냈고 91년에는 처음 실시된 광역의회의원선거에 시민들의 권유로 인천시의원으로 출마했다가 공천을 받지 못하고 추락했다. 시의원으로 출마한 것은 그가 88년 뉴스위크지의 표지인물로 게재되자 시민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쳐 인천 구월동 주택공사를 상대로 가구당 평균 400만원씩 400억원가량의 이자부담분을 돌려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결국 그는 92년 인천 소래포구에서 고깃배를 탔다. 그러나 고깃배에서 일하기에는 힘이 약해 쫓겨났고 다시 건설현장에서 1년간 철근일을 한 후 인천 송도의 한 모텔에서 3년간 청소원으로 침대시트를 깔고 화장지를 비우는 일을 하며 버텼다.
97년에 들어 그는 월 60여만원을 받는 주차원이 되었다.그 2년간 인천시 시설관리공단에서 166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노조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구하는 주차원들의 눈길을 외면할 수 없어 고민 끝에 2000년 11월 노조위원장이 됐다.
그의 아내는 인천 만수동 동일방적 노조사건 등을 통해 70년대 여성 노동운동계에 이름을 널리 알린 김옥섭씨(46·민주화운동공로자).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호웅씨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고깃배를 탈 당시 파출부일로 생계를 꾸리는 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이혼을 결심하기도 했으나 아내는 그 어려운 고비를 홀로 이겨냈다.
키 161㎝, 몸무게 50㎏의 왜소한 체격의 유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한문실력만큼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다. 방2칸 전세 650만원짜리의 옹색한 살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유씨는 “87년 4·13호헌선언에 이어 6·29선언까지 나왔으나 민주화세력이 흩어지고 그해 12월 대선에서 패배해 영·호남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대중운동의 순수성은 여전히 필요하다”며 “앞으로의 대중운동은 반부패추방운동에 맞춰 우리 사회에 희망을 길러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정창교 jcgyo@kmib.co.kr
지난 1977년 현장노동자의 수기인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대학가와 지식인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유동우씨(53). 87년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노동계 대표로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했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인천시설관리공단 소속 주차원 190여명의 일터를 지키는 노조위원장으로 생활하면서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창작과 비평사의 웹메거진(www.changbi.com) 지난 7월호에 ‘진보콤플렉스를 넘어서’라는 글을 통해 ‘진보콤플렉스’가 대중적인 노동운동의 하부구조를 망가뜨렸다고 목소를 낸 것을 시작으로 요즘에는 자신이 운동권에 몸담으면서 만나온 인사들에 대한 재평가 등을 담은 ‘돌멩이’들의 뒷얘기를 정리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먹히지 않고 노동운동의 방향도 아득해 보이는 시절에 과거의 힘들고 소중한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노동자상(像)’을 모색하고 나선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는 합법적인 제도 아래서 우리는 노동자를 교육하고, 단체협상과 임금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시대와 노조원들이 목표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무용론을 외치며 정치운동으로 번졌던 과거의 이념논쟁은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80년대만 해도 공단 이곳저곳에 각종 소모임의 활동이 활발했지만 요즘은 현장운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하여 작은 것부터 개선해 나가는데 힘을 쏟겠습니다”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뒤 68년 3월 상경해 천일섬유·유림통상·방성산업·삼원섬유㈜ 등에서 노동자로 생활한 그는 73년 인천 부평공단의 외국인투자기업인 삼원섬유㈜에 노조를 설립했다. 그후 해고된 뒤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교육담당을 하는 등 공단이 있는 전국 각지역을 돌며 수많은 노동조합 설립에 산파역할을 했다.
77년에는 월간지 ‘대화’ 1·2·3월호에 새벽에 일터로 나가 일하다 통금사이렌을 듣고는 퇴근을 포기해야 하는 삶을 살면서도 먹고 살기 힘든 노동자들의 실상과 노조 해체과정을 담은 수기를 연재했다. 당시 이 수기는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얻으면서 ‘어느 돌맹이의 외침’이란 책으로 묶여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은 당시 작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대학생들 사이에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판금 조치됐지만 해적판 책을 읽은 대학생들이 인세를 모금해 올 정도였다.
81년에는 비공개 조직이었던 전민노련의 운영위원으로 일한 이태복씨가 체포된 뒤 그 해 8월 유씨도 검거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개월 이상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망가지지 않아 법정에서 논리정연한 진술로 방청석의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그후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지냈고 91년에는 처음 실시된 광역의회의원선거에 시민들의 권유로 인천시의원으로 출마했다가 공천을 받지 못하고 추락했다. 시의원으로 출마한 것은 그가 88년 뉴스위크지의 표지인물로 게재되자 시민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쳐 인천 구월동 주택공사를 상대로 가구당 평균 400만원씩 400억원가량의 이자부담분을 돌려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결국 그는 92년 인천 소래포구에서 고깃배를 탔다. 그러나 고깃배에서 일하기에는 힘이 약해 쫓겨났고 다시 건설현장에서 1년간 철근일을 한 후 인천 송도의 한 모텔에서 3년간 청소원으로 침대시트를 깔고 화장지를 비우는 일을 하며 버텼다.
97년에 들어 그는 월 60여만원을 받는 주차원이 되었다.그 2년간 인천시 시설관리공단에서 166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노조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구하는 주차원들의 눈길을 외면할 수 없어 고민 끝에 2000년 11월 노조위원장이 됐다.
그의 아내는 인천 만수동 동일방적 노조사건 등을 통해 70년대 여성 노동운동계에 이름을 널리 알린 김옥섭씨(46·민주화운동공로자).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호웅씨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고깃배를 탈 당시 파출부일로 생계를 꾸리는 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이혼을 결심하기도 했으나 아내는 그 어려운 고비를 홀로 이겨냈다.
키 161㎝, 몸무게 50㎏의 왜소한 체격의 유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한문실력만큼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다. 방2칸 전세 650만원짜리의 옹색한 살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유씨는 “87년 4·13호헌선언에 이어 6·29선언까지 나왔으나 민주화세력이 흩어지고 그해 12월 대선에서 패배해 영·호남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대중운동의 순수성은 여전히 필요하다”며 “앞으로의 대중운동은 반부패추방운동에 맞춰 우리 사회에 희망을 길러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정창교 jcgy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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